전체 글 (28) 썸네일형 리스트형 [단편] 술주정 낮이고 밤이고 가리지 않고 푹푹 찌는 무더위가 지나고, 해 저물면 선선한 바람이 불기도 하는 여름밤. 깜깜한 어둠 속에 노랗게 불을 밝히고 있는 작은 술집에 한 사람이 앉아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상 위에 남은 식기와 안주의 모양새가 조금 전까지, 여럿이 함께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으나 이제는 모두가 떠나간 술자리에 홀로 남아있었다. 그는 한쪽 볼에 팔을 괴고 앉아 맑은 소주병을 예사롭지 않은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 내쉬는 숨에서 풍기는 강한 알코올 냄새로 보아 제법 취한 듯하다. 소주병을 마주 세워두고 그는 주정을 시작했다. 나도 취할 자격이 있어. 취해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그거 좀 그냥 말하게 두고 들어주면 안 되는 거야? (검지손가락으로 소주병을 위협하며) 야, .. [이야기] 여름 반찬 후끈후끈 김이 올라오는 뽀얀 쌀밥은 한 입 후우~ 불어 입 안 가득 넣으면 든든하고 맛 좋은 양식이지만 오늘같이 숨 쉴 때마다 더운 열기가 가득한 찜통더위 속에서는 입으로 가져가기 참 어려운 한입이다. 밥상 앞에서 쉽게 숟가락을 들지 못하고 젓가락으로 꼼지락거리며 김치를 찢어 입에 넣고 사라진 입맛을 찾아본다. 엄마가 ‘여름엔 이런 걸 반찬으로 먹는 거야’ 하며 꺼내주시던 여름 반찬들을 생각한다. ‘그때는 냉장고가 없었으니까~’로 시작하는 엄마의 말처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로 탄생한 여름 반찬은 어떻게 만든 건지 모르고 그냥 먹어도 맛 좋고, 더위에 묻힌 입맛도 찾아주는 고마운 양식이다. 여름에 내가 가장 즐겨 먹는 건 오이지. 찰랑거리는 냉국 속에서 오이지 하나를 찾아 입 안에 넣으면 오도독오도독 .. [이야기] 깎아 내다 왼손 검지로 연필을 받쳐두고 오른손으로 커터칼을 쥐어 칼날을 빼어 든다. 왼손 엄지로 칼날을 잡고 밀어 올리며 사각사각 스윽스윽 가볍게 소리 내면 얇은 나무껍질이 부드럽게 벗겨진다. 짧아졌던 연필심이 충분히 고개를 내밀면 왼손으로 연필을 세워두고 심을 비스듬히 기울여 슥슥슥 삭삭삭 칼끝으로 살살 긁어낸다. 손가락 사이로 연필을 조금씩 굴려 가며 골고루 만져주어야 모양이 고르다. 정성스레 다듬은 연필을 잡고 첫 글자를 쓰는데 연필심 끝부분이 심심치 않게 부스러져 갈라진다. 두어 번 뱅글뱅글 휘갈기다 보면 자연스레 둥그러져서 공책 위를 부드럽게 흘러가고 그제야 만족한다. 처음 학교에 들어가서 연필을 잡고 쓰기를 배울 때는 기차 모양의 은색 연필깎이에 연필을 넣고 칙칙폭폭 세차게 손잡이를 돌려 끝을 뾰족하게 .. 이전 1 ··· 3 4 5 6 7 8 9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