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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단편] 술주정

낮이고 밤이고 가리지 않고 푹푹 찌는 무더위가 지나고, 해 저물면 선선한 바람이 불기도 하는 여름밤. 깜깜한 어둠 속에 노랗게 불을 밝히고 있는 작은 술집에 한 사람이 앉아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상 위에 남은 식기와 안주의 모양새가 조금 전까지, 여럿이 함께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으나 이제는 모두가 떠나간 술자리에 홀로 남아있었다. 그는 한쪽 볼에 팔을 괴고 앉아 맑은 소주병을 예사롭지 않은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 내쉬는 숨에서 풍기는 강한 알코올 냄새로 보아 제법 취한 듯하다. 소주병을 마주 세워두고 그는 주정을 시작했다.

 


나도 취할 자격이 있어. 취해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그거 좀 그냥 말하게 두고 들어주면 안 되는 거야?

(검지손가락으로 소주병을 위협하며) 야, 인마! 네가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자격을 운운해? 너 하나 내가 어쩌지 못한다고 말도 못 하게 하냐! 나도 목숨 걸고 달려들면 너 하나쯤은 끝장낼 수 있어! 내가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거야.

(팔짱 끼고 눈을 내리깔아 소주병을 본다) 너 얼마 하냐? 비싸 봐야 몇천 원이지. 옆에 이 안주는 열 배다, 열 배. 근데 얘를 먹으려면 너를 한 잔 받아야 한대. 너 마시지 않으면서 안주 먹으면 안주발 세운다고 눈치 보여서 젓가락 들지도 못하는데 회비는 꼬박꼬박 다 내고 있어. 그래도 불만이야, 나 원 참.

(잔에 소주를 채우고 눈앞에서 이리저리 돌려보며) 이게 무슨 묘약이라고! 너를 마시고 듣는 말은 누구도 기억을 못한데. 진짜 웃기지 않냐? 옆 부서 부장이 부사장 까는 얘기가 주신(酒神)들만 모인 술자리에서 나왔는데, 결국 부사장 귀에 들어가서 경고받았잖아. 내 앞에서는 뭐, 내가 술을 마시지 않아서 다~ 기억할 거라고 무서워서 말을 못 하겠다고 하는데. 듣는 사람 입이 무거워야 말이 안 도는 거지. 이거 한 병 마시지 않았다고 말이 안 돌겠냐?

그리고 말이야! (소주병을 하나 들어올려 한 손으로 삿대질하며) 네 핑계 대고서 할 말 못 할 말 다 하는 거. 그건 아니지.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네가 무슨 면죄부가 되는 거는, 좀 아닌 거 같다. 내가 너한테 더 뭐라 하면 또 나를 이상한 사람 만들까 봐 말을 못 해.

에잇! (잔을 입에 털어 넣는다. 한숨 후~ 뱉고서) 수습 기간 일 때는 잘 보인답시고, 회식에서 술 강요 안 한다, 어, 자기가 처음 사회생활 할 때 술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고 차별 안 한다고 하더니. 이제는 술 안 받겠다고 하면, 엄청나게 오바해. 이런 애들이 수틀리면 고소한다느니. 사람이 실수해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느니. 어떻게 사람을 그런 식으로 몰아갈 수 있는지 참, 기가 막힌다.

또 있지, 사람 앞에 두고 투명 인간 취급하는 거. (소주병을 두 손으로 잡고) 내가 지금 너도 내 말 상대로, 어, 인간 취급하는데. 잔 천천히 비운다고 혼자 술 마셔서 외롭다고 우는소리 하는 건 뭐야.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그러면 되잖아. 좀 맞춰주면 안 되나? 그냥 달리는 사람이 왕이 되는 세상이야. 아세트알데하이드 분해효소가 많으면 왕이 되고, 신 중에 최고라는 주신(酒神)이 되고, 이제 그 사람이 말하면 다 그대로 이루어지는 거야. 너는 술 마시지 않아서 재미가 없다 하면 재미없는 사람이 되고, 인간미 없는 놈이라 하면 인간미 없는 놈이 되고, 오래 살 거라 하면 장수하는 사람이 되는 거야.

술이 몸에 그렇게 안 좋다면서. 이번 건강검진에 고지혈증이랑 지방간, 뭐 안 좋은 건 다 나왔다고 호들갑이야. (상 위에 잔뜩 올라와 있는 빈 소주병을 나무라며) 다 너희들 때문이래. 그리고 나는 무병장수할 거란다. 너희랑 안 친해서~. 진짜 내가 아픈 곳이 없겠냐. 일 잘한다는 칭찬에 혹해서 일 년에 휴가 한 번 안 쓰고 다녔다. 하루가 멀다고 야근하면서 저녁까지 굶는 일도 다반사지. 20대 때도 힘들었는데 40을 바라보니 몸이 여기저기 고장 나서 병원 다니느라 휴가를 안 쓸 수가 없다. 그래도 무병장수하겠지. 우린 안 친하니까. 그치?  

 


술집 주인이 가까이 다가오자, 주정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본다. 가게에 남은 이는 주인과 그뿐이다. 병을 내려놓고, 천천히 일어나 계산한다. 고개를 꾸벅하고 소리 없이 인사하고 몸을 돌려 나온다. 어딘지 모르게 후련한 발걸음으로 밤길을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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