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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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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서랍을 열다 잠겨있는 서랍만큼 간절하게 열고 싶은 게 또 있을까. 책상 서랍 안에는 별거 없는 문방 용품이 있을 뿐이다. 언제나 꺼낼 수 있을 땐 찾지도 않던 필기구와 스티커가, 꺼낼 수 없을 땐 왜 그리도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나와 신랑이 나란히 책상에 앉아 있으면, 우리 아이는 심심하다고 옆에 꼭 붙어서 논다. 키보드도 두드려보고, 무선 이어폰도 만져보고, 그래도 할 게 없으면 내 책상 서랍 자물쇠를 가지고 논다.        원목 서랍은 네 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맨 위 칸만 자물쇠가 달려있다. 아이는 자물쇠에 열쇠를 넣고 여러 번 돌린다. 달칵하며 잠기는 소리가 나면, 잘 잠겼나 당겨본다. 덜컥덜컥 걸리는 소리가 나며 서랍은 꼼짝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열쇠를 돌려서 달칵 소리가 나면, 얼른 ..
[이야기] 그칠 줄 모르는 불안 나는 쉽게 불안해진다. 불안한 감정이 나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걸 잘 알면서도, 나의 불안은 그칠 줄 모른다.        신랑이 테무에서 물건을 주문했다. 그중 하나는 차량용 가습기였다. 국산 제품을 두 개나 썼었는데 둘 다 쉽게 망가져 버렸다. 어차피 잘 망가지는 거, 저렴한 게 낫다며 주문했다. 그런데 나는 집에 도착한 가습기를 바라보기만 할 뿐, 선뜻 켜지 못했다. 신랑은 차 타고 나들이 가는 길에 쓰자고 집어 들었다. 나는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렸다. 그는 그런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쉰다. 불안한 내 눈과 마주쳤다. 신랑의 답답한 마음이 목구멍까지 꽉 찬 게 보인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 이제는 화내지 않고 참으니 다행이다. 그런데 때마침 뉴스 보도가 나온다...
[이야기] 내가 좋아하는 색 어느 날 엄마가 내게 말했다.        “회색 옷 좀 그만 사렴.”        옷장을 들여다보자, 모양이 다른 무채색 옷이 나를 반겨 어리둥절했다. 딱히 이 색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은 없기 때문이다. 고를 땐 별 의미가 없었다. 다만, 가장 활용도 높은 걸 사다 보니 우연히 회색이었을 뿐이다.        언제부터 회색이 좋아졌는지 모르겠다. 어릴 적엔 오히려 싫어하는 색에 가까웠다. 그 시절 내가 즐겨 읽던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서는 회색 신사가 나온다. 그들은 사람을 꾀어내어 시간에 쫓기게 만드는 악당이었다. 회색 신사는 웃지도 않고 말투마저 건조했다. 삭막한 세상을 따뜻하게 되돌리려는 모모를 응원하며 끈질기게 쫓아오는 회색 신사가 빨리 사라지길 바랐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진학하..
[이야기] 타임 코스모스 아기공룡 둘리>에서는 ‘도우너’가 ‘타임 코스모스’를 타고 여행 한다. 시공간을 넘나들기도 하고, 먼 곳으로 날아가거나 우주로 여행하기도 한다. ‘타임 코스모스’는 거창한 기계가 아니라 바이올린에, 연주도 할 수 있다. ‘삐야삐야 깐따삐야 우주로~’하고 주문을 외우면 여행 시작이다.           나의 ‘타임 코스모스’는 내가 버리지 못한 물건들이다. 물건에는 저마다 이야기가 있다.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떤 과정을 거쳐 내 손에 들어왔는지. 그리고 나에게 와서, 나와 어떤 일을 함께했는지 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 책이다. 지금은 꺼낼 일 없는 책도, 눈이 마주치면 이야기가 전해지니 버리지 못하고 책장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나뿐만 아..
[이야기] 숙제 아이들이 자라면서 숙제하느라 바쁘다는 말이 들린다. 우리 아이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벌써부터 학교 가기 싫다고 한다. 숙제를 해본 적이 없으면서 어찌 알고 싫다고 하는지 신기하다. 악명이 높은 '숙제'지만 학교에서는 제법 재밌고 인생에 오래 남을 기억이 되기도 한다. 이런 말을 하니 내가 꼰대가 되긴 했나 보다. 라떼(나 때)는 말이야……. 처음 만난 숙제는 유치원에서 내준 '자세히 관찰하기'였다. 아빠의 전공을 살려 자동차 그림을 그려서 가져갔다. 선생님의 의도는 식물이나 동물을 관찰하는 것이었겠지만, 나는 아빠에게서 자동차의 작동 원리를 배워갔다. 그림을 그리며 설명해 주었던 젊은 아빠의 얼굴이 신나 보였다.. 회사 일이 바빠서 얼굴 보기도 힘들었던 시절인데, 아빠가 나서서 도와줬다는 사실이 신기하..
[여행] 인간 내비게이션 나는 지도를 좋아한다. 초등학교 방학 숙제로 위인전을 읽다가 특별히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며 감동했다. 직접 발로 뛰어 지도를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이 멋졌다. 나도 자전거 타고 동네를 쏘다니며 나만의 지도를 만들고 놀았다. 어린 동생을 옆에 앉혀두고, 이 길을 따라가면 뭐가 나오는지 지도를 그려주며 설명했다. 동생이 내 말을 잘 듣고 있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신났던 기억은 난다. 그래서인지 여행을 가면 먼저 지도를 챙긴다. 공항, 기차역, 여행자 안내소에 가면 받을 수 있다. 그냥 진열한 곳도 있지만 정성스럽게 지도를 만드는 도시일수록 안내소에 줄 서서 물어보면 건네준다. 학창 시절 수학여행부터 유럽 배낭여행 등에서 받아 온 지도를 간직했었다. 그러나 오래되고 찢어진 건 엄마의 잔소리에 눈물로..
[이야기] 알뜰살뜰 돈의 여유 “저는 알뜰하게 살고 있어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알뜰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났다. 나는 그 사람이 주저하지 않고 알뜰하다 자부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나는 알뜰하지 않다. 알뜰한 사람은 수입이 있으면 얼마를 먼저 저금하고, 나머지 돈으로 절제하며 생활한다고 한다. 사회초년생 시절, 회사 동기와 모이면 어떤 저축이 좋은지 정보를 공유하기도 했다. 회식 자리에서 심심치 않게 선배들이 저축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저금은 뒤로 하고 즐겁고 여유로운 소비를 택했다. 매달 소액만 저금하고, 월급 통장에는 항상 월급 이상의 돈을 넣어두었다. 통장에 잔고가 두둑하니, 마음마저 든든해지는 기분이었다. 회사 다닐 땐, 일이 바빠 다른데 돈 쓸 일은 없어서 주로 먹는 데 돈을 썼다. 어딜 가도 주저하..
[이야기] 끔찍이도 귀한 딸 우리 부모님은 나를 온실에 가두고, 여리여리하며 순종적인 꽃으로 키우고자 하셨다. 하지만 나의 기질과 양육 방식이 충돌하여 성장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내 안에는 크고 깊은 어둠이 자라났다. 하지만 빛도 함께 있다. 오늘은 밝은 면만 이야기하려 한다. 사랑만 받고 자란 귀한 외동딸(아님)로 오해받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우리 아빠는 노는 걸 싫어한다. 술도 멀리하며, 노래방도 안 가고, 영화도 안 보고, 여행도 안 좋아한다. 고집도 세서 아빠가 싫은 걸 권유하면 완강히 거부하기에, 엄마는 즐거움을 찾아야 할 때면 아빠 빼고 했다. 그런데 유난히 길었던 어느 명절 연휴에 너무 심심한 나머지 나는 부모님과 보드게임을 하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는 3인부터 할 수 있어서 아빠가 꼭 필요했다. 엄마를 먼저 ..
[여행] 두다다다다다 알프스 나는 겁이 많으면서, 동시에 모험심이 강하다. 그리고 산을 좋아한다. 이 성격과 취향이 합쳐져 가장 강렬한 추억을 남기고 온 여행이 있다. 친구와 함께 스위스 여행길에 올라 절반은 체르마트(Zermatt)처럼 유명한 관광지에서 시간을 보냈다. 출근해야 하는 친구를 먼저 한국으로 보낸 뒤, 남은 시간은 산속에서 지내기로 했다. 스위스는 안전하고 깨끗하기도 하지만, 1일 1산을 할 수 있어서 좋다. 등산 장비가 없어도 케이블카나 산악열차가 잘 되어있어서 힘들이지 않고 여유롭게 산에 오를 수 있다. 신발을 단화 두 켤레만 챙겨가서 처음에는 편하게 산을 즐겼다. 그러다 기분에 취해 진짜 등산까지 했더니, 단화 한 켤레가 망가지는 바람에 버리고 오기도 했다. 내가 방문한 리더알프(Riederalp)는 알프스 산맥..
[이야기] 제주도 곤충기 2. 반딧불이 사계절 내내 곤충을 찾아다니고, 사슴벌레도 사육하며 지내다 보니 지난여름 제주도 여행길에 올라 만난 운명 또한 반딧불이었다. 미리 계획하지도 않았는데 청수리 반딧불이 축제가 열리는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과 내가 제주도에 머문 시기가 겹쳤다. 반딧불이가 짝짓기 하는 시기에 무리지어 날아다니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보통 이런 인기 체험은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데, 아직 예약 가능 자리가 남아있었다. 이 기회를 어떻게 놓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부모님은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셨다. 어린 시절 반딧불이를 많이 봤다고 하면서, 우리끼리 다녀오라고 했다. 반딧불이 축제는 계획에 없던 일정이라 가려면 동선이 꼬여서 저녁 식사도 걸러야 했다. 그런데 반딧불이를 보러 가려면 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