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끈후끈 김이 올라오는 뽀얀 쌀밥은 한 입 후우~ 불어 입 안 가득 넣으면 든든하고 맛 좋은 양식이지만 오늘같이 숨 쉴 때마다 더운 열기가 가득한 찜통더위 속에서는 입으로 가져가기 참 어려운 한입이다. 밥상 앞에서 쉽게 숟가락을 들지 못하고 젓가락으로 꼼지락거리며 김치를 찢어 입에 넣고 사라진 입맛을 찾아본다. 엄마가 ‘여름엔 이런 걸 반찬으로 먹는 거야’ 하며 꺼내주시던 여름 반찬들을 생각한다. ‘그때는 냉장고가 없었으니까~’로 시작하는 엄마의 말처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로 탄생한 여름 반찬은 어떻게 만든 건지 모르고 그냥 먹어도 맛 좋고, 더위에 묻힌 입맛도 찾아주는 고마운 양식이다.
여름에 내가 가장 즐겨 먹는 건 오이지. 찰랑거리는 냉국 속에서 오이지 하나를 찾아 입 안에 넣으면 오도독오도독 짭조름 시원한 맛 깨소금 넣은 시원한 국물의 힘으로 밥 한 숟갈 꿀꺽하면 그렇게 힘이 난다. 고춧가루 물이 들어 먹음직스러운 꼬들꼬들한 오이지무침은 최고의 밥도둑. 밥 위에 듬뿍 얹어 먹으면 새콤하고 달짝지근 짭짤한 맛이 최고다. 냉장고에 한 통 가득 있었는데 며칠 먹으니 벌써 동이 났다. 이렇게 슬플 수가!
가지무침도 정말 맛있다. 높은 물가에도 여름 가지는 친절한 가격을 선사해 주어 고맙다. 살짝 쪄서 조선간장을 넣고 양념해서 무치면 말캉말캉 짭조름하니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아이 입에 넣어주면 금방 뱉어내는데, 나도 어릴 땐 그랬을까? 이제는 입에서 살살 녹는 맛이 좋은 걸 보니 어른이 되었나보다고 자부심을 느낀다.
무더위에 힘내라고 복날에 보양식을 먹는데 사실 최고의 보양식은 텃밭 채소가 아닐까 한다.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되었다. 결혼하고 텃밭에서 갓 따온 채소를 먹기 전까지는 그 맛을 몰랐기 때문이다. 부모님도 시내에서 자라 텃밭과는 거리가 멀었던 나는 ‘유기농’ 인증마크를 보고 마트에서 신선한 채소를 사며 만족했다. 그런데 주말농장에서 길렀다는 가지를 먹고 깜짝 놀랐다. 그냥 썰어서 팬에 굽기만 했는데도 달짝지근하고 풋풋한 신선함이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텃밭에서 갓 따온 애호박을 송송 썰고 소금을 살짝 뿌려둔 뒤에 가느다란 부추도 쫑쫑 썰어 넣어주고 부침가루에 계란 하나 탁 깨어 넣고 반죽을 만들어 부침개로 부쳐 먹으면 정말 맛있다. 야채만 넣은 전이 이렇게 맛있을 수 있다니! 한 끼 든든하게 챙겨 먹으려면 고기가 있어야 한다는 편견이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친구에게 나이 들면서 점점 야채의 맛을 알아간다고 이야기했더니 큰 공감을 받았다. 친구도 결혼하고 시댁에서 농사하며 텃밭 작물도 길러서 놀러 가면 갓 따온 채소로 상을 차리는데 고기가 하나도 없다고 했다. 처음에는 고기 없는 상이 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맛을 알아서 고기가 없어도 맛있게, 든든하게 먹고 온다고 한다.
하늘 위에서 나를 녹일 듯이 째려보는 햇살이 텃밭 위로 내리면 열매가 익고, 달곰해지고, 채소는 여물어지며 쫄깃해지고, 그걸 먹으면 더위를 이겨낼 힘이 생긴다. 스마트팜이 생겨나고 ‘버터헤드레터스’같은 작물이 나와 간혹 사 먹는다. 부드럽고 야들야들한 이파리에 만족스럽다가도, 흙에서 자라 바람과 뜨거운 태양을 온몸으로 맞으며 거칠게 자란 텃밭 채소의 맛이 그리워진다. 그래서 다음번엔 밭에서 기른 꽃상추를 사 와 한 입 베어 물면 살짝 질긴 줄기와 쫄깃한 잎사귀가 느껴지고 ‘그래, 이 맛이지’ 하며 끄덕이곤 한다. 스마트팜 채소의 부드러움은 더운 여름을 이겨낼 힘을 주기에는 너무 연약하다. 더위를 이겨내려면 이만한 더위를 이겨낸 양식을 먹어줘야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야기] 제주도 곤충기 2. 반딧불이 (2) | 2023.11.02 |
---|---|
[이야기] 제주도 곤충기 1. 두점박이 사슴벌레와 애기뿔소똥구리 (2) | 2023.11.02 |
[이야기] 깎아 내다 (3) | 2023.07.13 |
[이야기] 나의 사슴벌레 (1) | 2023.06.29 |
[이야기] 나는 왜 엄마가 되고 싶었나 (4) | 2023.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