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29) 썸네일형 리스트형 [여행] 두다다다다다 알프스 나는 겁이 많으면서, 동시에 모험심이 강하다. 그리고 산을 좋아한다. 이 성격과 취향이 합쳐져 가장 강렬한 추억을 남기고 온 여행이 있다. 친구와 함께 스위스 여행길에 올라 절반은 체르마트(Zermatt)처럼 유명한 관광지에서 시간을 보냈다. 출근해야 하는 친구를 먼저 한국으로 보낸 뒤, 남은 시간은 산속에서 지내기로 했다. 스위스는 안전하고 깨끗하기도 하지만, 1일 1산을 할 수 있어서 좋다. 등산 장비가 없어도 케이블카나 산악열차가 잘 되어있어서 힘들이지 않고 여유롭게 산에 오를 수 있다. 신발을 단화 두 켤레만 챙겨가서 처음에는 편하게 산을 즐겼다. 그러다 기분에 취해 진짜 등산까지 했더니, 단화 한 켤레가 망가지는 바람에 버리고 오기도 했다. 내가 방문한 리더알프(Riederalp)는 알프스 산맥.. [소설] 겨울 작은방 안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여자가 있다. 먼저 방문 옆에 커다란 파란색 이삿짐 상자를 펼쳐두었다. 장롱문을 열고 안에 있는 몇 벌 남지 않은 옷가지를 꺼내어 침대 위로 가져갔다. 한 벌씩 가지런히 개켜 모은 후, 옷가지를 모아 커다란 투명색 비닐로 꼼꼼히 싸매어 상자 안으로 넣는다. 이제 여자는 책상 앞에 섰다. 책장에 꽂혀 있는 전공 서적과 어릴 때부터 모아두었던 상장이 들어있는 바인더, 사진 앨범을 꺼내어 상자로 옮겼다. 책상 서랍을 열어 갖가지 필기구와 잡동사니를 철제 과자 상자에 옮겨 담아 파란 상자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신발장을 열어 구두와 운동화 두어 켤레를 꺼냈다. 신발마다 준비한 부직포 가방에 넣고 끈을 조였다. 신발 가방도 차곡차곡 파란 상자에 가지런히 넣었다. 이렇게 짐을 다 쌌는데.. [소설] 가을 남자는 항상 고독했다. 이맘때면 특히 더 외로움에 빠지곤 했다. 가로수에 무성했던 싱싱한 이파리가 붉게 물들어 가면 초조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새파란 하늘이 불어주는 바람 한 점에 우수수 떨어지는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이 더없이 허전해지고 말았다. 옆에 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그는 언제나 마음이 시렸다. 연인을 품에 안을 때면 잠깐 뜨거운 열기를 느끼기도 했지만, 그 열기는 펄떡거리는 심장이 잠잠해지면 땀과 같이 허무하게 식어버리곤 했다. 고독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함께했고, 생을 살아가는 동안 그와 한 몸이 되었다. 그는 이 느낌이 익숙하고, 이제는 놓아줄 수 없을 만큼 간절하게 원하기도 했다. 아직 빨래통에 있는 반소매 윗도리가 무색해질 만큼 급격히 추워진 바깥 공기에 뺨이 제법 차가.. [이야기] 제주도 곤충기 2. 반딧불이 사계절 내내 곤충을 찾아다니고, 사슴벌레도 사육하며 지내다 보니 지난여름 제주도 여행길에 올라 만난 운명 또한 반딧불이었다. 미리 계획하지도 않았는데 청수리 반딧불이 축제가 열리는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과 내가 제주도에 머문 시기가 겹쳤다. 반딧불이가 짝짓기 하는 시기에 무리지어 날아다니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보통 이런 인기 체험은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데, 아직 예약 가능 자리가 남아있었다. 이 기회를 어떻게 놓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부모님은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셨다. 어린 시절 반딧불이를 많이 봤다고 하면서, 우리끼리 다녀오라고 했다. 반딧불이 축제는 계획에 없던 일정이라 가려면 동선이 꼬여서 저녁 식사도 걸러야 했다. 그런데 반딧불이를 보러 가려면 렌터.. [이야기] 제주도 곤충기 1. 두점박이 사슴벌레와 애기뿔소똥구리 ‘여기 오면 이건 꼭 봐야지!’라며 명소를 찾고 인생샷을 찍으면서 여행의 보람을 느끼곤 한다. 제주도에서는 예쁜 해변과 바다, 오름을 오르며 보는 경이로운 자연 속에서 여행의 맛을 찾곤 한다. 나도 제주도에 가면 꼭 봐야하는 자연물이 있었다. 두점박이 사슴벌레와 애기뿔소똥구리.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에서만 서식하는 보호종이기 때문이다. 두점박이는 일반 사슴벌레와 다르게 밝은 갈색이며, 등에 두 개의 점이 있다. 따뜻한 동남아에 서식하는 풍뎅이처럼 색이 독특하고 아름다워서 자칫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사랑받아 멸종되지 않도록 보호종으로 지정했다고 한다. 애기뿔소똥구리는 자연 방목하는 가축의 똥을 먹고 사는데 서식지가 점점 줄어들어 개체수가 많이 줄고 있다고 한다. 일반 소똥구리보다 크기가 작아 어른의 엄지손톱만.. [책] 150년 하버드 글쓰기 비법 2020년에 남겼던 책 리뷰인데, 개정판이 나오며 내 리뷰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됐다. 그래서 여기에 올린다. 책을 다 읽고나니 제목에 배신감이 드네요. 저자는 하버드 글쓰기에 대한 경험이 없는데 자신이 주장하는 O.R.E.O. 기법이 어떻게 하버드 글쓰기 비법이라고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저자가 주장하는 O.R.E.O.에서 R(근거)과 E(예시)가 없는, O(주장)만 서술한 책이에요. 하버드 생이 실제로 O.R.E.O.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근거도 없으며, 하버드 생의 글이 한 편도 예시로 나오지 않았어요. 저자가 하버드를 나오지도 않았으며, 하버드생을 가르쳐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O.R.E.O. 기법이 하버드 글쓰기 비법이라고 할 수 있나요? 저자가 주장하는 O.R.E.O. 기법은 영어 작.. [단편] 술주정 낮이고 밤이고 가리지 않고 푹푹 찌는 무더위가 지나고, 해 저물면 선선한 바람이 불기도 하는 여름밤. 깜깜한 어둠 속에 노랗게 불을 밝히고 있는 작은 술집에 한 사람이 앉아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상 위에 남은 식기와 안주의 모양새가 조금 전까지, 여럿이 함께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으나 이제는 모두가 떠나간 술자리에 홀로 남아있었다. 그는 한쪽 볼에 팔을 괴고 앉아 맑은 소주병을 예사롭지 않은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 내쉬는 숨에서 풍기는 강한 알코올 냄새로 보아 제법 취한 듯하다. 소주병을 마주 세워두고 그는 주정을 시작했다. 나도 취할 자격이 있어. 취해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그거 좀 그냥 말하게 두고 들어주면 안 되는 거야? (검지손가락으로 소주병을 위협하며) 야, .. [이야기] 여름 반찬 후끈후끈 김이 올라오는 뽀얀 쌀밥은 한 입 후우~ 불어 입 안 가득 넣으면 든든하고 맛 좋은 양식이지만 오늘같이 숨 쉴 때마다 더운 열기가 가득한 찜통더위 속에서는 입으로 가져가기 참 어려운 한입이다. 밥상 앞에서 쉽게 숟가락을 들지 못하고 젓가락으로 꼼지락거리며 김치를 찢어 입에 넣고 사라진 입맛을 찾아본다. 엄마가 ‘여름엔 이런 걸 반찬으로 먹는 거야’ 하며 꺼내주시던 여름 반찬들을 생각한다. ‘그때는 냉장고가 없었으니까~’로 시작하는 엄마의 말처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로 탄생한 여름 반찬은 어떻게 만든 건지 모르고 그냥 먹어도 맛 좋고, 더위에 묻힌 입맛도 찾아주는 고마운 양식이다. 여름에 내가 가장 즐겨 먹는 건 오이지. 찰랑거리는 냉국 속에서 오이지 하나를 찾아 입 안에 넣으면 오도독오도독 .. [이야기] 깎아 내다 왼손 검지로 연필을 받쳐두고 오른손으로 커터칼을 쥐어 칼날을 빼어 든다. 왼손 엄지로 칼날을 잡고 밀어 올리며 사각사각 스윽스윽 가볍게 소리 내면 얇은 나무껍질이 부드럽게 벗겨진다. 짧아졌던 연필심이 충분히 고개를 내밀면 왼손으로 연필을 세워두고 심을 비스듬히 기울여 슥슥슥 삭삭삭 칼끝으로 살살 긁어낸다. 손가락 사이로 연필을 조금씩 굴려 가며 골고루 만져주어야 모양이 고르다. 정성스레 다듬은 연필을 잡고 첫 글자를 쓰는데 연필심 끝부분이 심심치 않게 부스러져 갈라진다. 두어 번 뱅글뱅글 휘갈기다 보면 자연스레 둥그러져서 공책 위를 부드럽게 흘러가고 그제야 만족한다. 처음 학교에 들어가서 연필을 잡고 쓰기를 배울 때는 기차 모양의 은색 연필깎이에 연필을 넣고 칙칙폭폭 세차게 손잡이를 돌려 끝을 뾰족하게 .. [이야기] 나의 사슴벌레 사슴벌레에게 참나무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자,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 보금자리이며, 먹이를 주는 양분이다. 참나무가 쓰러져 땅에 묻히고 눈 이불을 덮고 시간을 보내면 사슴벌레는 나무 안으로 들어가 알을 낳는다. 알에서 애벌레가 깨어나 톱밥을 먹으며 자라고, 다 자라면 번데기가 되었다가 나무 밖으로 나온다. 다 큰 성충 사슴벌레가 되어서도 여전히 참나무즙을 가장 좋아해 곁에 머문다. 아이와 함께 넓적 사슴벌레를 키우면서 참나무와 톱밥을 많이 만지며 놀았다. 촉촉하게 물을 뿌려주어야 사슴벌레가 좋아한다. 물을 머금은 나무는 포근하면서 잔잔한 자연 냄새가 난다. 적당한 습도와 온도 그리고 시간이 만나면 참나무에는 버섯이 핀다. 버섯이 핀 참나무는 암컷 사슴벌레가 알을 낳기에 가장 좋은 나무다. 아이의 손으로..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