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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나는 왜 엄마가 되고 싶었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인생 N 회차’ 등 회귀물이 인기다. 지금의 기억과 경험을 그대로 안고 과거의 나로 돌아간다면 더 현명하게, 최선의 선택만 하며 더 나은 삶을 살아갈 거라는 상상. 그것이 주는 통쾌함 때문에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좋아하나 보다. 하지만 나는, 시간을 정말로 돌릴 기회가 생긴다면 거절하고 싶다. 거창한 이유는 아니고, 내가 다시 ‘엄마’가 될 수 있을지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엄마가 되기 전의 나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어린 시절부터 아이를 좋아했다. 같이 뛰어놀면 금세 깔깔거리고 웃는 얼굴이 좋았다. 중·고생이 되어서도 교복 입고 놀이터에 나가 동네 애들과 얼음 땡 하고 놀아서 철없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해외여행을 가서도 어느 나라든 상관 없이 모든 아이에게 관심..
[책] 임계장 이야기 임계장: 임시 계약직 노인장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단어였다. 우리 외할머니가 얼마 전까지 임계장이었던 거네. 요즘은 노인장들도 일해야 살아갈 수 있기에 많은 분이 일자리를 찾는데 정규직은 1%도 못 구할 것이다. 모두 임시 계약직이겠지. 외할머니가 일을 나가 고용주와 함께 식사할 때에는 항상 눈치를 보며 양껏 드시지 못했다. 자식들은 그런 엄마가 어리석어 보였는지 왜 눈치를 보느냐며 타박했다. 나도 외할머니가 일을 그렇게 잘하시면서 당당하게 밥 먹지 못하는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었는데, 임계장은 매 순간 고용주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그랬던 거다. 임계장에게는 욕설보다 ‘내일부터 나오지 마세요’라는 말 한마디가 무섭다는 것이 가슴이 아프다. 관리자의 말 한마디에 15년 다닌 직장도 ..
[이야기] 외할머니의 인생 3부. 인생 끝자락에 맞이한 예수님 꽃이 활짝 핀 수목원을 걷다 보면, 두 팔로 핸드폰을 쭉 뻗어 화면 가득 꽃을 담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요리조리 열심히 핸드폰 각도를 돌려가며 아름다운 꽃의 모습을 담으려 노력하는 그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지긋하게 든 어르신인 경우가 많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지. 열정적으로 꽃 사진을 찍고 있는 저 어르신의 마음이 꽃처럼 싱싱한 것만 같아, 무표정으로 걷던 내 얼굴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우리 외할머니도 꽃을 참 좋아하신다. 축하할 일이 있을 때, 고운 빛의 생화를 드리면 참 기뻐하시곤 한다. 나는 외할머니의 그런 모습이 좋다. 외할머니가 외삼촌이랑 외숙모를 괴롭힐 때는 정말 밉고 나에게 그녀의 피가 흐른다는 것에 절망을 느낄 때가 있는데, 달아나는 정(情)을 잡아..
[이야기] 외할머니의 인생 2부. 때로는 가족보다 남이 낫다 인생은 외롭다. 외로운 인생에서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내 가족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내 가족에게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며 살아간다. 외가댁 식구들을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고 친구도 많다. 밖에서는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데 집 안으로 들어가면 그 좋은 사람들은 온데간데없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그래서 내 눈에는 나이 들고 사회활동을 할 수 없는 외할머니가 외나무다리를 홀로 휘청거리며 건너는 사람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외할머니의 자식 셋 중에 자기 엄마와 깊은 대화를 나누어 본 사람이 있을까? 내가 중학생 때 외할머니가 집에 오..
[소설] 판타지아 그녀는 침대 밖으로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오른팔을 들어 올려 머리맡에 있는 핸드폰을 찾았다. 애인의 몸에 깔려있던 반대쪽 팔을 힘주어 빼낸 뒤 바로 누웠던 몸을 뒤집어 침대에 엎드렸다. 그새 잠이 든 남자는 그녀의 팔이 몸에서 떨어지자 벽 쪽으로 그녀를 등지고 돌아누웠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살짝 한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 다리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간 이불을 끌어 몸을 감쌌다. 이불은 솜이 가볍게 누벼져 있어 따뜻하면서도 겉감은 감촉이 부드러운 60수 면 원단이라 맨살에 닿았을 때 포근하고 기분이 좋았다. 색은 파스텔 톤에, 잔잔한 꽃무늬로 되어있어 귀엽다. 이불을 감싸 안으면 어린 강아지를 안고 있는 듯해서 그녀는 이 이불을 좋아했다. 이불 밖으로 하얗고 날씬한 두 발을 내어놓고, 무릎을 굽혀 ..
[소설 쓰기] 소설을 쓰기 전 고민 코로나 시대의 흐름을 타고 언택트 프로젝트로 야한 소설 쓰기에 도전해보았다. '소설도 처음 쓰는데 야한 걸 쓰다니! 어떻게 쓰지?' 하면서도 정말 재밌을 것 같았다. 그래서 참여했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창작자에게 혼을 불어넣기 위해 리소스를 제공해주었다. 창작하기 전에 영감을 얻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추천해준 소설과 영화를 봤는데 충격을 받았다. 내 시선에서 '야하다'는 건 나에게 호기심과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고 즐거움을 주는 것인데. 그 작품들은 나를 너무나 불편하게 했다. 정리해보자면 이런 것들이었다. 여성을 남성의 욕구 충족을 위한 도구로 보는 시선 여성의 신체는 수치스러운 자세와 부위까지 세밀하게 묘사하나, 남자의 신체는 근육이 멋있다거나 성기가 크다는 등 ‘우월함’만 강조 작품이 성을 착취하는 도구..
[이야기] 외할머니의 인생 1부. 전쟁으로 헤어진 가족의 슬픔을 떠안다 외할머니에 대해서 써보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3부로 나누어 쓰려고 한다. 1부. 전쟁으로 헤어진 가족의 슬픔을 떠안다 나이가 든다는 건 무얼까. 몸이 아프고, 힘이 없어지고, 기억력이 감퇴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런 부정적인 것들만 생각할 때가 있다. 엄마가 외할머니랑 대화하고 나서 나에게 투정 부리는 걸 듣고 있자면, 아흔을 바라보인 노인(老人)이란 존재가 이 세상에 살아갈 의미가 없는 것만 같다. 재개발 지역의 오래되고 낡은, 곧 사라질 주택처럼. 몇 년 전, 부모님과의 다툼 끝에 도피처로 외할머니의 집을 택했던 때가 있다. 외할머니와 단둘이 하루 넘게 있었던 적은 인생에서 몇 번 없었다. 외할머니는 나이가 들어서 ‘어르신을 부려 먹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습니다. 이제 나..
[이야기]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일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좁은 인간관계를 갖고 있다. 주변에서 많이 하는 이야기가 나이가 들수록 새로 사람을 사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그건 아마도 내 마음이 불안정했고, 가족으로 대표되는 주변의 관계가 그런 나를 평온하게 해주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감정이 예민한 아이였다. 부모님은 내가 사춘기를 큰일 없이 보냈다고 하지만 그건 나를 이해하지 못해서 할 수 있는 말이다. 나에겐 ‘질풍노도(Sturm und Drang)’의 시기가 정말 말 그대로 폭풍이 몰아치고 파도가 덮치는 바다에서 살아남는 것만큼 힘들었다. 작은 환경의 변화나 한 사람의 말에도 내 마음에는 큰 파도가 일렁였다. 그런데 잦은 이사로 초등학교 ..
[이야기] 그 가게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 얼마 전 일이 있어서 북촌 길을 지나갔다. 오랜만의 외출이어서 그런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예뻤다. 지난달에 생활비를 아껴서 여윳돈이 있으니 모처럼 옷 한 벌 사면 좋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길을 걸으며 눈을 요리 저리 돌려서 아기자기한 상점들과 상점 안에 진열된 물건들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내 취향의 옷을 발견했다. 린넨 검은색 조끼. ‘사고 싶다.’ 언젠가부터 무언가를 사고픈 마음이 들면, 내가 그걸 사도되는 명분을 찾기 시작한다. 내가 돈을 쓴 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이리 재보고 저리 재본다. 저 조끼는 내가 가지고 있는 원피스랑도 입을 수 있고, 티셔츠랑 바지 위에 입어도 잘 어울리겠다. 이번 달엔 쇼핑도 안했으니까 나를 위해 돈을 써도 괜찮겠지. 사도 될 것 같은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