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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이야기] 서랍을 열다

나와 오랜 시간 함께 한 서랍

   

 

     잠겨있는 서랍만큼 간절하게 열고 싶은 게 또 있을까. 책상 서랍 안에는 별거 없는 문방 용품이 있을 뿐이다. 언제나 꺼낼 수 있을 땐 찾지도 않던 필기구와 스티커가, 꺼낼 수 없을 땐 왜 그리도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나와 신랑이 나란히 책상에 앉아 있으면, 우리 아이는 심심하다고 옆에 꼭 붙어서 논다. 키보드도 두드려보고, 무선 이어폰도 만져보고, 그래도 할 게 없으면 내 책상 서랍 자물쇠를 가지고 논다.

 

      원목 서랍은 네 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맨 위 칸만 자물쇠가 달려있다. 아이는 자물쇠에 열쇠를 넣고 여러 번 돌린다. 달칵하며 잠기는 소리가 나면, 잘 잠겼나 당겨본다. 덜컥덜컥 걸리는 소리가 나며 서랍은 꼼짝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열쇠를 돌려서 달칵 소리가 나면, 얼른 당겨 열리나 확인한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잘 논다.

 

      다음 날 서랍이 열리지 않는데,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는 열쇠를 자물쇠에 꽂아두는데, 전날 아이가 서랍을 잠그고 열쇠를 다른 곳에 두었나 보다. 아이에게 열쇠를 어디에 뒀는지 물었더니, 서랍 맨 위 칸에 넣어두었다고 한다. 서랍이 잠겨있는데 열쇠를 넣었다니, 마술을 부린 걸까. 결국 열쇠는 찾지 못하고 한 달여의 시간이 흘렀다.

 

      중요한 물건은 들어있지 않았기에 잠긴 채로 두어도 큰 불편은 없었다. 글을 쓸 때 내 연필 대신 신랑이 빌려준 샤프를 들었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필통과 그 안에 들어있는 연필이 무척 그리웠다. 시간 날 때마다 집안 이리저리 열쇠를 찾아 헤맸다. 아이가 서랍을 잠갔을 때, 내가 옆에서 잘 봐야 했는데. 눈을 떼지 말 걸 그랬다. 아니면 서랍이 잠긴 그날 열쇠를 바로 찾아봤어야 했는데 너무 안일했다고 끊임없이 자책하는 나날을 보냈다.

 

      답답함에 아이에게 물었다.

 

      “우리가 서랍을 계속 열지 못하면 어쩌지?”

 

      “엄마, 그러면 서랍을 부숴야 하나?”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아팠다. 이 서랍은 나와 30여 년을 함께 했고, 학창 시절 추억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물건에 애정을 쏟는 나로서는 서랍을 다치게 할 수 없었다. 열쇠를 찾을 수 없다면, 탐정 만화에서처럼 자물쇠를 열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주말 아침, 자물쇠 여는 영상을 보며 공부했다. 영상에서 알려준 준비물을 챙겼다. 클립 두 개와 니퍼가 필요했다. 클립은 하나뿐이라 다른 하나는 옷핀을 구부려 대체했다. 니퍼가 없어 두꺼운 펜치를 최대한 정교하게 다루며 클립을 물결 모양으로 다듬었다.

 

      동영상에 나오는 서랍 자물쇠와 많이 달라서 잘 될지 확신이 없었다. 밑져야 본전이니 과감하게 클립과 옷핀을 자물쇠 안에 넣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신기하게도 자물쇠가 돌아가고 있었다. 반 바퀴 돌리니 멈췄다. 다시 요리조리 콕콕 찔러 넣으며 돌렸더니 한 바퀴 더 돌아 달칵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내가 드디어 해냈어!”

 

      서랍을 열어 챙겨 든 필통을 아이와 신랑 앞에 내밀며 외쳤다. 우리 셋은 다 함께 손뼉 쳤다. 어떻게 자물쇠를 열었는지 재현까지 하며 기쁨을 만끽했다. 통쾌하고 개운한 이 기분이 참 오랜만이다. 내가 못 할 일이 무어냐. 이 집에선 모든 것을 통달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여기에 아이가 한 마디 얹어주었다.

 

      “엄마, 엄마가 서랍을 열지 못했으면 우리가 부술뻔했잖아.”

 

      아이는 내가 서랍을 부수길 기대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난 오랜 동반자인 서랍도 온전히 지켜냈다. 이 순간만은 성취감에 맘껏 취해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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