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도를 좋아한다. 초등학교 방학 숙제로 위인전을 읽다가 특별히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며 감동했다. 직접 발로 뛰어 지도를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이 멋졌다. 나도 자전거 타고 동네를 쏘다니며 나만의 지도를 만들고 놀았다. 어린 동생을 옆에 앉혀두고, 이 길을 따라가면 뭐가 나오는지 지도를 그려주며 설명했다. 동생이 내 말을 잘 듣고 있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신났던 기억은 난다.
그래서인지 여행을 가면 먼저 지도를 챙긴다. 공항, 기차역, 여행자 안내소에 가면 받을 수 있다. 그냥 진열한 곳도 있지만 정성스럽게 지도를 만드는 도시일수록 안내소에 줄 서서 물어보면 건네준다. 학창 시절 수학여행부터 유럽 배낭여행 등에서 받아 온 지도를 간직했었다. 그러나 오래되고 찢어진 건 엄마의 잔소리에 눈물로 작별하고, 일부만 남아있다.
가끔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다가 지도를 꺼내볼 때가 있다. 도시마다 길이 뻗어나가며 생긴 모양이 다 달라서 재밌다. 지도를 보며 길을 찾았던 추억도 떠올라 재밌다. 여행 가면 주로 내가 길 찾는 담당이었다. 지도를 좋아하고 길도 빨리 잘 찾았기 때문이다. 이 많은 지도 중에 내가 가장 오랜 시간 들여다본 건 로마와 베네치아다.
로마는 볼거리가 너무 많아 지도를 유심히 보며 다 살피고 다니느라 바빴다. 여차하면 뭔지 모르고 유서 깊은 건물이나 분수를 그냥 지나쳐버릴 수 있었다. 사람도 항상 많았다. 관광객뿐 아니라 현지인도 많아, 퇴근 시간에 지하철과 버스를 타면 서울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로마의 복잡함에 익숙해지고 나니 하루 뒤에는 지도를 안 보고도 숙소에 잘 찾아갈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길이 정말 복잡했다. 작은 도시지만, 이틀 내내 지도를 붙들고 다녀도 길이 헷갈릴 정도였다. 다른 도시는 방향만 잘 잡으면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익숙한 건물이나 거리를 먼저 찾고, 이를 기준으로 숙소나 관광지를 찾아냈다. 그런데 베네치아는 막다른 골목과 수로로 끊어진 길이 많았다. 방향만 보고 가면 그 길에는 수로를 넘어갈 수 있는 곤돌라나 다리가 없어 다시 돌아가야 했다.
베네치아에서 이틀을 자고 나니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사흘째에는 지도를 안 챙기고 돌아다녔다. 예쁜 창문과 발코니를 뽐내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골목에서는 길을 잃어도 좋았다. 신나게 돌아다니고 숙소로 가는 길인데, 같은 숙소에서 묵는 한국인 학생이 길을 잃었다고 지도가 있냐고 물었다. 자신 있게 내가 길을 아니까 따라오기만 하라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숙소에 거의 다 왔을 무렵, 건널 수 없는 수로를 마주하고 말았다. 이 수로만 건너서 모퉁이를 돌면 바로 숙소가 있는데, 참 얄미운 베네치아였다. 민망했으나 다시 길을 돌아가 결국 숙소를 찾았다.
기억 속 베네치아는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니 더욱 아름다웠다. 원래 해가 지면 잘 안 돌아다니는데, 이 동네는 치안이 좋은 듯해서 숙소 언니 한 명과 저녁 산책을 했다. 조용한 거리, 물 흐르는 소리, 가게를 밝히는 노란 조명등을 걸음마다 눈에 담고 마음에 새겼다. 내 손에는 지도가 없었다. 그렇게 베네치아를 떠나게 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길을 모두 익혔다. 숙소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은 나를 보고 ‘인간 내비게이션’이라는 칭호를 달아주었고, 내심 자랑스러웠다.
이토록 길을 잘 찾던 나인데, 요즘은 새로운 장소의 길을 익히는 일이 더 어렵게 느껴진다. 스마트폰 들여다보며 걸어서일까, 똑같이 생긴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섰기 때문일까. 이제는 길을 잃으면 큰일날 듯, 처음부터 스마트 길 안내를 손에 쥐고 실패하지 않는 길을 간다. 바쁜 일상에서는 힘들겠지만, 여행을 가면 길 찾는 즐거움을 지키기 위해 지도를 손에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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