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알뜰하게 살고 있어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알뜰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났다. 나는 그 사람이 주저하지 않고 알뜰하다 자부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나는 알뜰하지 않다. 알뜰한 사람은 수입이 있으면 얼마를 먼저 저금하고, 나머지 돈으로 절제하며 생활한다고 한다. 사회초년생 시절, 회사 동기와 모이면 어떤 저축이 좋은지 정보를 공유하기도 했다. 회식 자리에서 심심치 않게 선배들이 저축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저금은 뒤로 하고 즐겁고 여유로운 소비를 택했다. 매달 소액만 저금하고, 월급 통장에는 항상 월급 이상의 돈을 넣어두었다. 통장에 잔고가 두둑하니, 마음마저 든든해지는 기분이었다. 회사 다닐 땐, 일이 바빠 다른데 돈 쓸 일은 없어서 주로 먹는 데 돈을 썼다. 어딜 가도 주저하지 않고, 먹고 싶은 걸 선택했다. 항상 시원하게 돈을 쓰니, 월급의 80%를 저축하는 사람이 나를 보며 걱정을 내비쳤다. 그렇지만 저금을 뒤로했을 뿐, 통장에 돈이 모이면 예금을 넣었기에 결과적으로 모으는 돈에는 동기와 큰 차이가 없었다.
돈은 쓰기로 마음먹으면 시원하게 써야 즐겁다. 신랑과 쇼핑가서 옷을 살 때면 신랑이 나를 보며 ‘참 화끈하게 잘 사네’라고 말한다. 창고형 매장에서 매의 눈으로 신랑에게 어울리는 옷을 찾아내 계산대로 향하는 나를 보며 할 소린가 싶다. 그의 눈에는 내가 즉흥적으로 큰돈을 주저하지 않고 쓰는 백만장자로 보이는 듯하다. 결혼 후 소비 성향이 많이 다른 신랑과 나의 차이점은 무얼까 고민해 봤다. 결론은 간단했다. 나는 예산안에서 돈을 쓰기에 주저하지 않을 뿐이다.
예산의 개념이 생긴 건 엄마가 주었던 용돈 덕분이다. 우리 엄마는 10년을 기업 전략기획실에서 근무했고, 예산 집행부터 결산까지 총괄했다. 회사를 나오고 집안 살림도 같은 방식으로 했다. 그 때문에 내 용돈도 월급처럼 매달 주었다. 유년 시절부터 돈을 월급쟁이처럼 관리하다 보니, 나만의 요령이 생겼다.
현실감 있는 예산을 세우고 그에 맞춰 사는 것이다. 나는 충동구매를 즐긴다. 그래서 충동구매 할 여유를 예산에 둔다. 일 년 고정 지출은 간단히 기록해 두고, 예산안은 내 머릿속에 있다. 엄마는 가계부를 꼼꼼히 작성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살림과 육아하며 작성한 ‘장부’가 여러 권이었다. 나는 가계부는 쓰지 않는다. 일기와 마찬가지로 꾸준히 기록하는 재능과 끈기가 없다. 다행히 시대를 잘 타고나 언제든지 카드 내역을 확인 할 수 있어 좋다. 필요할 때마다 확인하며 여유가 있으면 더 쓰고, 없으면 안 쓴다.
결혼 후 경제적 상황이 많이 달라져서 지출을 줄일 수 없는데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상황이 닥쳤다. 처음엔 나를 희생해서 소비를 줄여봤다. 그랬더니 병이 났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고, 현실을 그대로 보기로 했다. 예산안을 대폭 수정했다. 절제하지만 희생하지 않는 방식을 찾았다. 나만 좋아하는 산딸기는 포기하지만, 온 가족이 좋아하는 참외를 산다. 운동복은 사지 않아도 운동은 하러 간다. 고기가 먹고 싶으면 돼지 앞다릿살을 통째로 사다가 양껏 먹는다.
그러나 먹고 사는 데 꼭 필요한 건 사야 하고, 자식 노릇, 교우 활동도 필요하니 소득은 중요하다. 소득이 예산에 미치지 못하면 더 벌어야 한다. ‘외벌이’로 어깨가 무거운 신랑에게 경제 교육을 단단히 했다. 수입이 불안정하다는 단점은, 필요하면 더 일해서 더 벌 수 있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예전처럼 저축을 뒤로 미룬 게 아니라, 할 수 없게 되긴 했다. 그럼에도 마음 졸이지 않고 내 방식대로 여유 부리며 살려고 노력한다.
알뜰살뜰 살면 뿌듯하겠으나, 역시 가장 즐거운 건 예상을 벗어난 깜짝 소비다. 결혼 후 가장 기뻤던 일 중 하나는 좋은 옷 한 벌을 구매한 일이다. 내가 명절 증후군으로 고생할 때, 나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발견했다. 좋은 옷이지만 비쌌다. 그런데 신랑이 적극적으로 사자고 해서 결국 샀다. 원래 신랑은 돈은 최대한 안 쓰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그 날은 달랐다. 예산을 벗어난 지출이었지만 기분이 참 좋았다. 명절 증후군도 싹 나았다. 아직도 그 옷을 입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돈은 잘 쓰면 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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