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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이야기] 내가 좋아하는 색

     어느 날 엄마가 내게 말했다.

 

      “회색 옷 좀 그만 사렴.”

 

      옷장을 들여다보자, 모양이 다른 무채색 옷이 나를 반겨 어리둥절했다. 딱히 이 색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은 없기 때문이다. 고를 땐 별 의미가 없었다. 다만, 가장 활용도 높은 걸 사다 보니 우연히 회색이었을 뿐이다.

 

      언제부터 회색이 좋아졌는지 모르겠다. 어릴 적엔 오히려 싫어하는 색에 가까웠다. 그 시절 내가 즐겨 읽던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서는 회색 신사가 나온다. 그들은 사람을 꾀어내어 시간에 쫓기게 만드는 악당이었다. 회색 신사는 웃지도 않고 말투마저 건조했다. 삭막한 세상을 따뜻하게 되돌리려는 모모를 응원하며 끈질기게 쫓아오는 회색 신사가 빨리 사라지길 바랐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진학하니 날마다 회색 교복을 입었다. 처음엔 안 이쁘다고 생각했었는데, 매일 입다 보니 익숙해졌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옷이 되었다.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있으니 무리 속에 조용히 파묻힐 수 있어 좋았다. 점점 큰 존재감 없는 무난한 회색이 좋아졌다. 있는 듯, 없는 듯, 하지만 어디에나 있는 색. 나도 그런 사람이고 싶었다.

 

      그렇지만 내가 화려하게 빛나길 바라는 사람도 있었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스승님이나 회사 사장님도 그랬다. 기대에 부응하려고 억지로 나서 보기도 했다. 하지만 과정은 힘들었고, 성과가 있을지언정 부작용도 많았다.

 

      이제는 내 색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기로 했다. 비 오는 날 걷다 보면 회색빛 보도블록이 점점 진해지고 축축해진다. 나도 그렇게 무거울 때가 있다. 그러나 또 어떤 날은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밤하늘을 빛내는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기도 한다. 색이 화려하지 않아도, 충분히 빛날 수 있으니 나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세상이 다양한 색으로 가득 차 있어서 참 다행이다. 내가 다른 색으로 변하지 않아도, 여러 사람과 같이 어우러지면 충분히 알록달록 예쁠 수 있으니까. 그러니 오늘도 회색 의자에 앉아, 회색 커튼 사이로 비치는 풍경을 마음 편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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