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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이야기] 외할머니의 인생 2부. 때로는 가족보다 남이 낫다

  인생은 외롭다. 외로운 인생에서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내 가족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내 가족에게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며 살아간다.

 

  외가댁 식구들을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고 친구도 많다. 밖에서는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데 집 안으로 들어가면 그 좋은 사람들은 온데간데없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그래서 내 눈에는 나이 들고 사회활동을 할 수 없는 외할머니가 외나무다리를 홀로 휘청거리며 건너는 사람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외할머니의 자식 셋 중에 자기 엄마와 깊은 대화를 나누어 본 사람이 있을까? 내가 중학생 때 외할머니가 집에 오셨는데 엄마가 안 계셨다. 둘이서만 있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점이 있었다.

 

자꾸만 빨갱이가 따라온다.”

 

  외할머니가 말하는 빨갱이는 중공군일 때도 있었고 북한에서 온 공작원일 때도 있다고 했다. 그러고는 욕을 하다가, 서운한 일이 생각났는지 욕이 나온 김에 서운했을 일과 서운하게 만든 사람들 이야기를 하면서 나쁜 소리를 하셨다. 속에 한이 꽉 찰 만큼 억울하셨나 보다는 생각에 잠자코 듣고 있었다. 나중에 엄마에게 외할머니가 했던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귀담아듣지 않았다. 엄마는 항상 내 이야기를 듣지 않으니, 나도 그러려니 하고 또 지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최근에 외할머니의 그런 증세(누가 따라온다거나 하지 않던 욕을 한다는)가 심해졌다는 소식을 여러 사람을 통해 듣게 된다. 외할머니는 돈이 생기면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기를 즐긴다.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냐, 다 쓰고 죽으련다라는 부단히 노인다운 말씀을 하시면서 이 돈을 어디에 쓰면 좋을까, 하는 행복한 고민을 한다. 좋은 선물을 고른다고 정관장판매점을 수소문해서 버스를 갈아타며 찾아가시고는 신부님, 아들, 손주를 챙기느라 많이 사셨다고 한다.

 

  내가 외할머니네 방문했을 때, 많은 선물 중 하나가 안 보인다고 하셔서 확인해보려고 상점에 전화하게 되었다. 그 상점 사장님은 목소리가 내 나이와 가까운 듯 젊었는데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노인 혼자 구매하면 바가지 씌우는 곳도 많은데 가격도 정직하게 받고 값나가는 사은품도 챙겨주었다. 게다가 집이 먼데 노인 혼자 버스 태워 보내려니 마음이 안 좋아서 자신이 직접 차를 태워서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물건이 없어진 것은 상점 탓이 아니어서 잘 찾아보겠다고 했고, 결국 장롱 안에서 찾았다. 그렇게 통화가 끝나는데 마지막에 사장님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랑 차 타고 가는데 자꾸 누가 따라온다고 하시더라고요. 가족이니까 알고 계시죠? 혼자 살게 놔두면 안 될 것 같은데…….”

 

  사장님과 통화하고 싶다고 전화 바꿔 달라고 기다리는 외할머니와 두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나는 눈을 피해버렸다. 고개를 돌려서 나이가 많아 그렇다고 둘러대고는 성급히 전화를 끊었다. 외할머니도 뭔가 이상한 걸 느꼈는지 어색하게 돌아섰다. 괜히 미안해졌다. 알겠다고 말하고 외할머니 바꿔줄걸. 그 사장님께 고맙다는 인사하고 싶었을텐데. 나는 그 당시 덤덤하게 넘겼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아보니 많이 당황했던 것 같다.

 

  이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봉투 만드는 일을 관두라는 권고를 받았다. 관리자가 말하기를 외할머니가 자꾸 헛소리하셔서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결국 더 버티지 못하고 외할머니와 복지관에 가서 심리상담을 받고 정신과에서 약을 처방받았다. 병원에서도 치매나 섬망은 아니라고 한다. 공식적으로 진단을 받으니 자식들도 인정하고, 우리 엄마도 외할머니에게 정성이라는걸 쏟는다. 요즘엔 딸 노릇 잘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신과 의사가 외할머니와 진료가 끝나고 엄마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말씀하시면 끊지 말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세요.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고 하시네요.”

 

  아, 그 말을 듣고 나는 큰 물결이 내 가슴을 덮치는 느낌을 받았다. 외할머니의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그것이 아니었나, 나 또한 마찬가지가 아닌가. 누구나 그럴 것이다. 가족이 아닌 남들은 외할머니가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데, 정작 가족들은 외면하고 있었으니. 때로는 가족보다 남이 낫다. 이제라도 엄마가 외할머니의 말을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니 다행이었다. 나는 엄마가 사람에 대한 전반적인 태도를 바꾸지 않을까, 조금 기대했다. 하지만 역시나 의사가 시키는 대로 자기 엄마에게만 그렇게 한다는 점이 나에게 씁쓸함을 남긴다.

 

  외할머니에게 처음 빨갱이가 등장한 건 6·25 전쟁이었다. 고향이 신탄진 근처였는데 중공군이 내려온다고 할 때마다 마을 처녀들은 얼굴에 검댕을 묻히고 산에 들어가 며칠을 숨어지냈다고 한다. 만약 그때 실제로 중공군을 만났다면 지금까지 트라우마가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중공군도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테니까. 그런데 외할머니는 두 눈으로 중공군을 확인한 적은 없고, 그 당시 겪은 공포심만 남았다. 두려운 마음은 전쟁이 끝나도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평생을 빨갱이에 쫓기는 병을 안게 되었다.

 

  전쟁의 후유증은 참 많은 모습이 있다. 휴전하고 평화롭게 지내니까 이제 다 끝이라고, 통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전쟁을 겪은 사람에게는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그 고통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외할머니가 소녀였을 때, 자신의 두려움을 온전히 들어주고 보듬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괜찮았을까? 외할머니의 아빠가 꼭 안아주면서 중공군은 갔다고, 혹시 다시 오더라도 아빠가 지켜준다고 약속했으면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았을까? 평생 두려운 마음을 안고 살아왔다니, 누구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홍삼 사장님 말처럼 외할머니를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아, 우리 엄마도 매일 몇 번이나 통화하고 일주일에 한 번 하루를 같이 보내고 있다. 정말로 같이 사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걸 자식들 모두 알고 있기에 선뜻 말을 꺼내지는 못한다. 부질없는 말이지만, 내가 로또에 당첨되면 마당 있는 큰 집 하나 사서 할머니들 방 하나씩 내어주고 같이 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