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마흔도 되기 전이지만, 내가 배우고 살았던 가치와 이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가 매우 다름을 느낀다. 간혹 마주하는 당혹스러움에, 세상이 나를 밀어내다 못해 억까*한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어르신이 스마트폰 사용이나 키오스크 주문에 어려움을 느끼는 바와 같이 나 또한 빠르게 변하는 디지털 세상에 당황하는 일이 많다. 디지털 쿠폰을 쓰러 어느 상점에 갔을 때 일이다. 쿠폰 금액에 최대한 맞춰서 알뜰하게 상품을 담았다. 계산대에서 당당하게 바코드를 내밀며 계산해달라고 했다. 보송보송한 얼굴의 직원은 나를 안타깝게 보더니, 앱을 설치해서 쿠폰 등록을 해야 결제가 가능하다고 한다. 나는 민망함을 감추고 다시 맨 뒤로 줄을 서서 급히 앱을 깔았다.
‘이쯤이야 쉽지, 뭐.’
그러나 빠르게 변하는 디지털 세상은 나에게 좌절감을 선사하고 말았다. 여기저기 눌러봐도 쿠폰 등록하는 곳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동정심에 호소하기로 했다.
“제가 잘 못 찾겠네요. 도와주세요.”
착한 직원은 익숙한 일이라는 듯 내 핸드폰을 받아 들고 1초도 되지 않아 쿠폰 등록 화면을 띄워버렸다. 그리고 나에게 또 다른 과제를 내밀었다.
“바코드 번호를 입력하시면 결제해 드릴게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뒤에 서 있는 다른 고객의 눈치를 봐가며 서둘러 입력했다. 그러나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번호만 입력할 수 있게 되어있는데, 내 바코드는 알파벳이 섞여 있었다.
“정말 죄송한데요. 바코드 번호 여기 있어요. 직접 해주실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스피드라는 걸 직원도 아는지, 재빠르게 폰을 건네받아 처리해 주었다. 나를 기다려준 사람에게 빚 진 마음을 갚으려면, 최대한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했다. 나는 현금영수증 처리도 마다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며 빠르게 사라졌다.
컴퓨터 자격증도 여럿 따고 제법 잘 다룬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왔는데, 디지털 쿠폰 사용은 참 어렵다. 앱이나 키오스크를 사용하다 보면 쿠폰을 쓰기 위해 연구를 해야 한다. 돈 쓰는 건 물 흐르듯 쉽게 해놨는데, 혜택을 받는 건 아주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었다. 못된 심보라는 생각이 든다.
스마트폰이 필수인 세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TV나 컴퓨터 같은 디지털 기기에 의존하는 걸 경계하라고 배운 세대가 아닌가. 나 또한 손에서 핸드폰을 쉬이 내려놓지 않는 삶을 살고 있더라도, 한편으로는 ‘스마트한 세상’을 멀리하려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핸드폰도 기능 좋은 걸 사는 대신, 가성비 좋고 용량 적은 걸 샀다.
덕분에 새로운 앱 하나를 설치하면, 다른 앱 하나는 지워야 할 정도로 용량이 빠듯하다. 불편하지만 강제로 디지털 다이어트를 할 수 있기도 해서 바꾸지 않고 계속 잘 쓰고 있었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앱을 사용하라고 할 줄은 몰랐다.
카드 발급 당시 도서관 사정으로, 실물로는 받지 못해서 항상 스마트카드를 사용했다. 그런데 용량 부족으로 앱이 자꾸 지워지니, 바코드를 따로 저장해두고 보여주었다. 하지만 도서관은 정책을 강화했는지, 이걸로는 대출이 안 된다고 했다.
“저장한 바코드로는 대출 불가에요. 앱에 들어가서 보여주세요.”
별거 아닌 듯 말하는 도서관지기 앞에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껏 내가 고수했던 절약 정신은 이 시대에 뒤떨어지는 알량한 고집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는 도서관도 스마트해졌고, 앱을 이용해야만 본인 인증이 된다는 이유로 앱을 꼭 써야 했다. 그리하여 빵집에 갈 때는 제휴 포인트 앱을 깔고, 도서관에 갈 때는 시민 카드 앱을 깔고 반복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아이 학원을 보내면서는 학원 앱을 설치해야 했다. 사진첩과 카카오톡에서 지울 수 있는 건 최대한 지우고서도 자리가 부족하다. 다음에 핸드폰을 사게 된다면 용량 큰 걸 사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이제 내가 학창 시절 배운 절약 정신은 한물갔다. 제로 웨이스트가 유행처럼 다가왔지만, 실제로 실천해 보니 못 할 짓이다. 얼마 전 리넨 침구 세탁을 잘못하는 바람에 격자무늬 누빔을 따라 천이 여러 군데 찢어졌다. 다른 곳은 멀쩡하지만, 그냥 쓰기엔 불편했다. 고민 끝에, 찢어진 부분을 기워보기로 했다. 집에 천은 많았는데 같은 리넨 원단 중에 괜찮은 게 없었다. 그러다가 버리려던 리넨 원피스가 눈에 들어왔다. 침구와 색이 확연히 달라서, 이 원피스를 잘라 덧대면 우스운 모양이 나올 게 빤히 보였다. 새로운 천을 사서 덧대면 분명 예쁘긴 할 터였다. 시각적 아름다움과 제로 웨이스트 둘 중에 선택해야 했다.
결국 어차피 버릴 원피스를 활용하기로 하고 바느질을 시작했다. 바느질하면서 괜히 시작했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찢어진 부분이 꽤 많아서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바느질 특성상 한번 자리 잡고 앉으면 일어나기 쉽지 않다. 작은 바느질감만 해도 그런데, 큰 이불은 더했다. 아이 뒷바라지며, 식사 준비며 할 일이 많은데 다 제쳐두고 바느질만 하기 어려웠다. 작업시간만 따지면 12시간 남짓이지만, 2주 넘게 붙들고 있었다.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초록 리넨 침구는 연분홍 반창고를 여기저기 붙인 누더기가 되었다. 우리는 그 침구를 다시 침대에 씌워서 편안히 자고 있다. 찢어진 천 사이로 발가락이며 여기저기 걸렸었는데, 이제는 불편함 하나 없이 보드라운 촉감을 느끼며 푹 잘 수 있다. 외양이 못나서 그렇지, 기능에는 이상이 없다. 그러나 이 모양으로 사는 걸 당당하게 보일 수는 없다. 누군가의 눈에는 구질구질하고, 교양마저 없어 보이지 않을까.
우리 아빠는 40여 년을 비누 하나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었었다. 비누 하나만으로도 깨끗하게 씻을 수 있고, 간편하다는 이유였다. 게다가 빨랫비누와 세안 비누 구분 없이 사용했다. 하늘색 빨랫비누로 머리를 감는 모습이 익숙했다. 어쩐지 아빠의 머릿결은 항상 푸석푸석했다. 항상 짧게 머리를 관리하니 그나마 보기 나쁘지는 않았다. 나와 엄마는 그 사실을 알고 샴푸를 권했다. 처음에는 괜찮다고 하시다가, 나이 들면서 피부와 머릿결이 예전 같지 않으니, 샴푸를 쓰게 되었다. 머릿결은 보들보들해지고 한결 보기 좋았다. 지금은 다시 비누 하나로 씻는 게 유행이다. 하지만 나는 아빠가 샴푸를 계속 쓰면 좋겠다. 시대 정신을 따라서, 보기 좋게 외양을 가꾸고 풍족한 자원을 충분히 누리며 살았으면 한다.
내가 아빠를 생각하는 마음처럼, 나 자신도 세상에 억까당하지 않기 위해 적당히 타협하며 누릴 건 누리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누더기 침대에 얼굴을 비비며 오늘도 새로워진 세상에 나가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해본다.
* ‘억까’라는 건 ‘억지로 까다’의 줄임말이다. 주로 게임에서 많이 쓰는데, 불합리한 일을 당했을 때 억울함을 토로하며 쓰는 말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자면, ‘억까’당한게 아니라 오히려 본인이 그런 상황을 만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들여 빚어온 가치관은 쉬이 바뀌지 않고, 고생을 자처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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