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방 안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여자가 있다. 먼저 방문 옆에 커다란 파란색 이삿짐 상자를 펼쳐두었다. 장롱문을 열고 안에 있는 몇 벌 남지 않은 옷가지를 꺼내어 침대 위로 가져갔다. 한 벌씩 가지런히 개켜 모은 후, 옷가지를 모아 커다란 투명색 비닐로 꼼꼼히 싸매어 상자 안으로 넣는다. 이제 여자는 책상 앞에 섰다. 책장에 꽂혀 있는 전공 서적과 어릴 때부터 모아두었던 상장이 들어있는 바인더, 사진 앨범을 꺼내어 상자로 옮겼다. 책상 서랍을 열어 갖가지 필기구와 잡동사니를 철제 과자 상자에 옮겨 담아 파란 상자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신발장을 열어 구두와 운동화 두어 켤레를 꺼냈다. 신발마다 준비한 부직포 가방에 넣고 끈을 조였다. 신발 가방도 차곡차곡 파란 상자에 가지런히 넣었다. 이렇게 짐을 다 쌌는데도 아직 상자에는 자리가 남았다. 중요하거나 자주 쓰는 물건은 아들이 이미 챙겨간 모양이다. 상자 날개를 모아 박스 테이프를 두 번 단단히 붙여 고정해 두었다.
“이 상자 하나만 가져가면 되는 거지?”
외출준비가 끝난 남편이 여자에게 물었다. 현관 앞에는 남편이 미리 챙겨둔 아들의 컴퓨터 기기가 나와 있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은 함께 차에 짐을 실었다.
“당신도 잘 다녀와.”
남편의 인사와 함께 멀어지는 차를 뒤로하고 여자는 집으로 들어가 여행 갈 채비를 마쳤다. 오늘은 동창 세 명과 모여 숲속 산장으로 짧은 요양을 떠나는 날이다. 본래 단풍놀이였어야 하는데, 갑자기 아들 결혼 날짜가 잡히는 바람에 성탄 여행으로 변모했다. 겨울치고는 따뜻한 날이 계속되었는데, 가방을 싸며 틀어둔 일기예보에는 강원 산간은 눈도 많이 내리고 춥다고 한다. 여자는 털모자와 목도리, 장갑을 챙겨 가방에 넣었다.
약속 장소에 나가 친구의 차를 다 같이 타고 산장으로 향했다. 친구 둘은 셋 중 유일하게 일 다니는 여자를 배려한다고 뒷자리에 앉혀두었다. 홀로 뒷자리에 앉은 여자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듯 보였다. 하지만 여자의 두 눈에는 텅 빈 작은방이 비치고 있었다. 아들이 타지로 학교를 가면서부터 자주 비어있던 방이었다. 주말이나 방학에 집에 와서 하는 일이라고는 컴퓨터를 켜고 게임을 하는 게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항상 방을 청소하고 겨울에는 난방을 올려두었다. 그런데 마지막 남은 컴퓨터마저 보내버리니 그 전에 비어있던 느낌과는 다른 공허함이 방을 채웠다. 이제 작은방은 주인을 잃었다.
한참을 달린 차가 고속도로를 나와 산속으로 들어서고 창문을 열어보니 공기가 달랐다. 한숨 크게 들이마시면 몸속 깊은 곳까지 신선한 공기가 느껴졌다. 곧 숙소에 도착했다. 발 빠른 친구가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난방을 올렸다. 각자 짐을 풀 동안 바닥이 따뜻해지도록 거실 마루에 이불을 펴두었다. 한 사람씩 마루로 나와 이불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몸을 뜨끈하게 녹였다.
“역시 겨울엔 이게 최고야.”
셋이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이고 웃었다. 이번 숙소의 분위기가 좋다는 말도 나왔다. 연말 성수기라서 뽑기로 숙소가 정해졌는데, 운 좋게 전망이 좋은 자리에 배정됐다 한다. 거실 큰 창으로 탁 트인 하늘과 넓은 잔디 마당이 보였다. 마당에는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서 있었다. 여행 온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해가 저물자 트리 장식에 불빛이 들어와 방에서 마당을 내다보면 연말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밖에서 저녁 식사 후에 숙소에서 마실 술과 간단한 주전부리를 사 왔다. 마루에 이불을 펴고 모여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환갑이 넘도록 함께 한 친구들이기에 알 거 다 알고 편한 사이였다. 그렇지만 오늘은 어딘가 마음이 불편했다.
“아들 장가보내느라 수고했어. 축하해.”
첫 잔은 결혼 축하와 함께 시작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술이 쓰게 느껴졌다. 조용히 미소 지으며 할 수 있는 말을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친구 둘도 자식이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어, 여자의 마음을 어느 정도 공감해 주었다. 그렇지만 모두 다른 인생을 살고 있기에, 같은 엄마라고 해서 여자와 같은 마음으로 자식의 결혼을 받아들이진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친구들의 위로가 여자에게는 알 수 없는 외국어로 듣는 낯선 언어 같았다.
“잘 살아야 할 텐데…….”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여자의 걱정스러운 한마디에 두 친구는 열심히 응원을 이어갔다. 그러나 여자의 걱정은 아들이 미덥지 않아서도 아니고, 며느리 탓도 아니었다. 아이는 모르겠지만 여자가 바라본 아이는 자신을 닮았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줄 아는 아이였다. 학교나 학원에 가는 것 보다 집에서 홀로 노는 게 더 좋다고 했다. 여자는 그런 아이를 나무라기보다 존중하면서 밝게 키우려 노력했다. 고독은 우울함과 다르기 때문이다. 여자의 노력을 저버리지 않고 아이는 친구와도 잘 지내고 사회생활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렇지만 결혼은 다른 문제였다. 고독하길 원하면서 결혼한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결혼은 고독한 자의 숨통을 막고, 슬픔에 가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는 아들의 성급한 결혼을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아이가 여자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물으면, 내가 해봐서 안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이 앞에서 결혼 생활이 우울하다고 고백한다면 아이에게는 자신의 존재가 상처가 될 수 있으니까. 아이 탓이 아니라고 해도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없는 마음을 여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마음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결국 자식의 결혼을 축복해 주지 못한 속 좁은 어미만 남았다. 사실은 급하게 잡은 결혼 날짜도, 조금 무례했던 사돈댁의 분위기도 상관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모든 게 끝나고 돌아보니 여자는 그저 아이의 결혼이 그의 삶에 새로운 행복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혼자만의 시간보다, 사랑하는 연인과 같이 있는 시간이 더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지금과는 달랐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들의 갑작스러운 결혼은 불안한 여자의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주지 않았다. 갈무리하지 못한 마음은 뜨겁고 뾰족해서 상처를 남겼다. 아직은 그 상처가 열에 데인 듯 몹시 아프고 슬펐다.
술병을 모두 비우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거실과 화장실, 안방을 오가는 분주한 몸놀림 사이로 TV에서 흘러나오는 날씨 예보가 비쳤다. 오늘은 남쪽의 따뜻한 공기와 북쪽의 차가운 공기가 서로 격렬하게 씨름하는 밤이라고 했다. 여자도 타들어 가는 마음과 씨름하면서 이제는 이 마음이 차가워지기를 바라며 잠들었다.
아침이 왔음을 직감한 몸이 어렴풋이 잠에서 깼다. 술기운 때문인지 오늘 여자의 눈은 쉽게 떠지지 않았지만 매일 일어나던 시간이라 정신이 말짱해지고 있었다. 아직 모두 곤히 자고 있는 듯해서, 이불을 단단히 여민 채로 뻣뻣하게 굳은 몸을 조심스레 꼼지락거렸다. 밤새 뜨끈한 방바닥에 몸이 푹 녹아서 그런지 평소보다 관절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하지만 사부작거리며 이불이 내는 눈치 없는 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 정적 속에 살그머니 퍼지는 소리에 신경을 쓰다 보니, 창문 밖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고 느꼈다. 어젯밤 잠들기 전과는 다른 고요함이 커튼 뒤에서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슬며시 손을 들어 늘어진 커튼을 들어 올리자 두텁게 쌓인 눈이 푸른 어스름을 머금은 하늘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여자는 가만히 누운 채로 한참 동안 온 세상을 덮은 눈을 바라보았다. 차가우면서도 포근한 눈이 참 좋았다.
따뜻한 커피와 함께 아침을 시작했다. 부지런한 친구 한 명이 전기포트로 물을 끓여 머그잔을 데워주었다. 따뜻한 컵에 커피를 마셔야 맛있다는 이유였다. 탁자에 둘러앉아 머그잔을 하나씩 손에 품었다. 예열해 둔 커피 머신에 캡슐을 넣고 느긋하게 한 잔씩 내렸다. 여자는 커피를 담은 머그잔을 들고 거실 창가로 가서 섰다.
뜨거운 커피를 한 숨 불어 식히자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와 유리창에 서린다. 뿌연 시야 사이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은 춥지도 않은지 깔깔거리며 눈을 뿌려대며 놀고 있다. 크리스마스트리 옆으로는 눈사람을 만드는 가족이 보였다. 이미 제법 큰 눈덩이가 만들어졌는데 아직 만족스럽지 않은지 크기를 계속 불려 나가고 있었다. 여자가 커피 한 잔을 다 비울 때쯤에는 어른 가슴팍까지 올 정도로 큰 눈사람이 서 있었다.
식사는 미리 준비해 온 샐러드와 과일로 간단히 해결하고 밖으로 나가 눈길을 거닐기로 했다. 먼저 거실에서 지켜봤던 예쁜 잔디마당으로 나갔다. 눈사람은 가까이에서 보니 솔방울과 나뭇가지, 낙엽으로 웃는 얼굴을 만들어 아기자기하고 귀여웠다. 여자는 자기가 두르고 있던 빨간 털목도리가 눈사람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망설임 없이 목도리를 풀어 눈사람에게 둘러주었다. 친구들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금세 웃으며 사진을 찍자고 했다. 목도리를 두른 눈사람 앞에서 모두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근사한 크리스마스 사진이었다.
여행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 짐을 쌌다. 마지막으로 차에 타기 전 여자는 잔디 마당에 들렀다. 해가 저물고 크리스마스트리에 조명이 들어와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옆에 서 있던 눈사람은 어느새 짓뭉개져서, 흩어져버린 눈 덩어리만 남아있었다. 아직 녹지 않은 눈은 덩어리진 채 자신을 밟은 누군가의 신발 자국을 품고 있었다. 그 눈덩이 사이로 빨간 털뭉치가 보였다. 여자의 허전한 목에 산에서 불어온 차가운 바람이 휘감겼다. 겨울의 서늘함이 뜨겁게 타들어가는 심장을 식혀주었다. 눈사람에게 목도리를 둘러줬을 때 주었던 애정에 여자는 행복했고, 그걸로 충분했다. 다시 돌려받을 마음은 없었다. 여자는 그대로 떠났다. 바람이 불며 크리스마스트리 위에 쌓여있던 눈이 날아가 눈사람이 있던 자리 위로 떨어졌다. 빨간 털뭉치는 하얀 눈에 덮여 흔적 없이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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