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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소설] 부군에게 쓰는 편지

 

       당신이 돌아가시고 20년도 더 넘어버렸습니다. 당신이 누워계신 산소는 아들이 개선하여 유골함을 더 모실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제가 직접 가보니 처음 봉분을 만들었을 때부터 떼가 잘 살고 빛깔이 좋았는데, 여전한 모습입니다. 이제 나도 당신 옆에 누울 준비가 끝나갑니다.

 

       내 삶이 끝난다면 당신 옆에 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22살 노처녀이긴 했으나, 당신이 북에 처와 아들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숨기고 나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용서하기 힘들었습니다. 북에 계신 형님은 얼마나 가슴이 쓰라렸을지, 그리고 나와 결혼한 날 당신은 어땠을지 생각했습니다. 그 마음을 헤아리다 보면 저는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결혼에는 연민이 남았습니다.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당신이 불쌍했습니다. 하루아침에 부모님, 형제, 아내와 아들과 생이별한 그 마음이 어떨까 싶어, 서운한 일이 있어도 내색하지 않으며 속으로 눌러 담았습니다. 내 어머니가 위중하다는 소식에도 선뜻 나서지 못한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말을 당신 앞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마지막 엄마 얼굴을 보지 못한 일이 후회로 남았습니다.

 

       명절이면 당신 고향에 갈 수 없어서, 저도 마음 둘 곳 없었습니다. 음식도 하고 북에 계신 조상님께 제사도 올렸지만 길 잃은 고아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들뜬 마음으로 설빔을 차려입고 고향에 내려갔다가, 부모님을 뵙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웠습니다. 시집살이하더라도 어른이 계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미움받을 길도, 사랑받을 길도 없다는 건 참 외로웠습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저는 언제나 사랑받고 싶었습니다. 집안일도 잘하고 성품도 훌륭하다는, 동네에 소문난 남편을 두었지만, 항상 외로웠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예쁘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남들은 당신이 저를 사랑하는 마음이 눈에 보이는데 꼭 말로 해야 아냐고 핀잔주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불안했습니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당신 눈에는 내가 아니라 이북에 있는 형님이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그 못난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늦은 나이에서야 하느님을 깨닫고 천주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원하던 사랑을 채웠습니다. 성당에서 미사를 받으면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먹은 듯, 마음이 따뜻하게 가득 차올랐습니다. 기도하고 헌신하는 삶이 좋아서, 제가 당신과 결혼하지 않고 하느님을 만났다면 수녀로 살지 않았을까 생각도 했습니다.

 

        제가 세례를 받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당신이 너무 섭섭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려줄 재산도 없는데, 제사를 지내라고 할 염치가 없었습니다. 그 대신 제가 줄 수 있는 유일한 하나, 신앙을 두 아이에게 물려주었습니다. 당신이 아끼고 예뻐했던 손주들도 세례를 받아 함께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곳에서 다시 만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습니다.

 

        얼마 전 둘째 사위가 뇌수술했습니다. 다행히 수술이 잘 되어 일상으로 회복했으나, 그 소식을 듣고 내가 너무 오래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꿈에 당신이 나오면, 저를 데려가 버릴 것만 같아서 두려움에 몸서리쳤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서 당신을 다시 만나, 손을 맞잡고 싶습니다. 인생 끝자락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지금은, 당신 옆에 누워도 괜찮겠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을 용서한 건지, 평생 못난 마음으로 산 저를 용서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갈 곳이 당신 곁이 아니고는 아무 데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곧 만날 날을 기다리며 글을 마칩니다.

 

        당신의 아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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