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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이야기] 깎아 내다

왼손 검지로 연필을 받쳐두고
오른손으로 커터칼을 쥐어 칼날을 빼어 든다.
왼손 엄지로 칼날을 잡고 밀어 올리며
사각사각 스윽스윽 가볍게 소리 내면
얇은 나무껍질이 부드럽게 벗겨진다.
 
짧아졌던 연필심이 충분히 고개를 내밀면
왼손으로 연필을 세워두고 심을 비스듬히 기울여
슥슥슥 삭삭삭 칼끝으로 살살 긁어낸다.
손가락 사이로 연필을 조금씩 굴려 가며
골고루 만져주어야 모양이 고르다.
 
정성스레 다듬은 연필을 잡고 첫 글자를 쓰는데
연필심 끝부분이 심심치 않게 부스러져 갈라진다.
두어 번 뱅글뱅글 휘갈기다 보면 자연스레 둥그러져서
공책 위를 부드럽게 흘러가고 그제야 만족한다.
 
처음 학교에 들어가서 연필을 잡고 쓰기를 배울 때는
기차 모양의 은색 연필깎이에 연필을 넣고
칙칙폭폭 세차게 손잡이를 돌려 끝을 뾰족하게 깎는 일에 열중했다.
 
손으로 연필 깎는 맛은 미술학원에서 배웠다.
부드러운 리듬감으로 선생님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얇게 말려 올라가는 톱밥이 신기했다.
그 손놀림을 유심히 관찰하고 혼자서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된 후에도 필기용 연필을 지니고 다니며 쉬는 시간마다 연필을 깎았다.
 
연필 다듬는 일에 몰두했던 나를 돌아보니
무언가를 깎아내는 과정이 필요했었나 보다.
연필을 깎으며 내 마음에 자라나는 불안감과 원망과 두려움과 증오를
연필밥으로 만들어 냈나 보다.
 
그리고 확인하고 싶었다.
이제 얼마나 남았을까. 아직 얼마나 더 가야 하나.
누군가에겐 자신이 정한, 아주 명확한 길이었지만
나에겐 막막했던 아주 어두웠던 길.
왜 가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길 위에서 연필을 보았다.
필통 끝자락에 닿을까 말까 했던 연필이 깎이고 깎여서 몽당연필이 되었을 때
드디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다 왔다고 안도하지 않았던가.
 
수많은 몽당연필을 만들면서 수북이 쌓아둔 톱밥들을 날려 보내고 난 지금
예전만큼 연필을 깎아내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연필을 좋아하고 연필로 글을 쓰고 있지만
엄지손가락만 한 휴대용 연필깎이에 넣고 돌돌돌돌 돌려 대충 다듬는다.
이제는 이렇게 깎아도, 저렇게 깎아도 그냥 연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