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이 있어서 북촌 길을 지나갔다. 오랜만의 외출이어서 그런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예뻤다. 지난달에 생활비를 아껴서 여윳돈이 있으니 모처럼 옷 한 벌 사면 좋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길을 걸으며 눈을 요리 저리 돌려서 아기자기한 상점들과 상점 안에 진열된 물건들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내 취향의 옷을 발견했다. 린넨 검은색 조끼. ‘사고 싶다.’ 언젠가부터 무언가를 사고픈 마음이 들면, 내가 그걸 사도되는 명분을 찾기 시작한다. 내가 돈을 쓴 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이리 재보고 저리 재본다. 저 조끼는 내가 가지고 있는 원피스랑도 입을 수 있고, 티셔츠랑 바지 위에 입어도 잘 어울리겠다. 이번 달엔 쇼핑도 안했으니까 나를 위해 돈을 써도 괜찮겠지. 사도 될 것 같은 마음이었다.
이제 가격을 물어보면 되는데, 가게에 들어서려고 하다가 문득 어린 시절 엄마랑 같이 갔던 옷가게가 생각났다. 가게 크기가 닮았고, 전면이 유리로 된 진열창에 옷을 걸어둔 모습도 닮았다. 엄마와 함께 했던 쇼핑이 떠오르며 내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어, 나는 다시 물러나 가게를 바라보다 발길을 돌렸다.
우리 엄마는 예쁜 옷을 입고 꾸미는 것을 참 좋아한다. 결혼 전에는 한껏 멋을 부리고 다니셨다고 한다. 월급이 많은 편도 아니었는데 머리는 명동 미용실에 가서 하시고, 옷과 신발도 꼭 ‘메이커’를 사서 입으셨다고 한다. 결혼 후에는 슬프게도 돈이 넉넉하지 않아서 쇼핑은 거의 할 수 없었지만, 그 때의 경험이 빛을 발하여 길에서 파는 저렴한 옷들 중에서도 세련되고 예쁜 옷을 잘 고르셨다. 동네 아줌마들이 우리 엄마 눈이 보배라는 말을 많이 했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중학생 때였던 것 같다. 날씨가 추워지고 있던 계절에 엄마랑 나는 이대 앞에 놀러갔다. 엄마는 대학가를 좋아해서 어린 나와 동생을 데리고 대학교에 소풍을 가곤 했었다. 그 때는 내가 컸으니 소풍을 간 것은 아니고, 시내에 나온 길에 들러서 구경하며 다녔던 것 같다. 아마 그 날 엄마의 마음은 내가 북촌에서 옷을 사고 싶었던 때의 기분 이었나보다. 지나가다가 작은 옷가게에 엄마 취향의 검은 원피스가 엄마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나는 엄마가 옷 구경할 때 가게 안을 들여다보며 기웃거렸다. 두 사람이 들어가서 보기에는 작은 가게였다. 엄마가 고른 것은 민소매 원피스였는데 소매에 작은 프릴이 달려있는 귀여운 모양새였다. 엄마는 속에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원피스를 입으면 좋겠다고 하며 거울 앞에서 옷을 이리저리 대보았다. 그리고 잘 어울리는 신발이 없어 고민하던 엄마에게, 마침 옷가게에 검은색 앵클부츠가 눈에 들어와 그 신발을 신고 원피스를 입어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셨는지 통 크게 옷과 신발을 모두 구매했다. 정말 오랜만에 한 쇼핑이었다. 집에 와서 다시 입어보면서 잘 샀다고 좋아하는 엄마를 보며 나도 즐거웠다.
그런데 엄마는 그렇게 기분 좋게 샀던 원피스를 많이 입지 못하셨다. 예쁜 원피스라고 좋은 곳에 놀러갈 때 입는다고 아껴뒀는데, 엄마가 그 옷을 꺼내서 입었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외할아버지가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새로 산 검정 원피스를 꺼내어 입은 엄마는 부엌 냉장고 옆에 쭈그려 앉아서 한참을 우셨다. 나는 한창 자다가 엄마 울음소리를 듣고 잠이 깨서 몽롱했을 텐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우는 엄마의 모습이 아직 선명하다.
그 날 이대 앞에서 했던 쇼핑은 엄마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몇 년이 지나 한 참 동안이나 엄마는 그 날 자기가 검은색 옷을 사지 말걸 그랬다고 자책했다. ‘내가 왜 검은색 옷이 사고 싶었을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려고 엄마가 검은색 옷을 사고 싶었나 보다.’ 그리고 그 원피스는 장례식이 있을 때 입는 옷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옷을 사고 싶다는 마음을 먹먹하게 접었다. 아직도 북촌 거리를 지나면 그 옷가게로 눈길이 간다. 이제는 옷 보다는 그 가게를 오가는 손님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에게는 새로 산 옷이 후회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계속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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