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내내 곤충을 찾아다니고, 사슴벌레도 사육하며 지내다 보니 지난여름 제주도 여행길에 올라 만난 운명 또한 반딧불이었다. 미리 계획하지도 않았는데 청수리 반딧불이 축제가 열리는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과 내가 제주도에 머문 시기가 겹쳤다. 반딧불이가 짝짓기 하는 시기에 무리지어 날아다니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보통 이런 인기 체험은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데, 아직 예약 가능 자리가 남아있었다. 이 기회를 어떻게 놓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부모님은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셨다. 어린 시절 반딧불이를 많이 봤다고 하면서, 우리끼리 다녀오라고 했다. 반딧불이 축제는 계획에 없던 일정이라 가려면 동선이 꼬여서 저녁 식사도 걸러야 했다. 그런데 반딧불이를 보러 가려면 렌터카를 가져갈 수밖에 없어서, 부모님은 저녁 드시고 숙소로 가실 때 차 없이 가셔야 한다. 식당과 숙소가 시내라면 상관이 없겠지만, 우리 숙소가 산속에 있어서 택시를 잡기가 어려워 걱정했다. 하지만 반딧불이를 보고자 하는 내 열정이 너무나 컸다. 고집부리는 딸을 보며 고생길이 훤한 아빠는 아무 말이 없었는데, 씩씩한 엄마가 알아서 숙소를 찾아갈 테니 다녀오라고 하셨다. 결국 부모님을 식당에 내려두고 불효자식은 반딧불이 마을로 떠났다.
반딧불이 마을은 정말 굉장했다! 체험 코스가 여럿 있었는데 우리는 아이와 함께 가는 한 시간 정도 코스를 선택했다. 체험 시작 전, 강의실에 모여 안내를 듣고 산책로 입구에 두 줄로 가지런히 서서 순서를 기다렸다. 반딧불이는 서로의 불빛을 보면서 짝을 찾기 때문에 인공불빛이 있으면 번식이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청수리 마을은 반딧불이를 지키려는 노력 중 하나로 저녁 시간이 되면 일제히 소등하고, 산책로도 가로등 하나 없이 깜깜했다. 마을 선생님이 한 팀씩 맡아 나무 막대기에 야광 낚시찌를 달고 이 불빛을 보면서 앞사람 속도에 맞춰 천천히 앞으로 나오라고 말했다. 인공불빛 하나 없는 어둠 그 자체인 숲속에서 선생님의 작은 불빛과 앞사람의 존재만 겨우 알아차리며 살금살금 발걸음을 내디뎠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고 공허한 우주를 가는 기분이었는데, 점차 어둠에 적응해 나가자, 시야가 조금 넓어져서 그림자같은 나무와 풀숲, 산길은 흐릿하게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은 걸어가며 숲속 깊은 곳을 멀리 보라고 하셨다. 그러면 반딧불이를 더 잘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조금씩 깊은 숲으로 들어가 거닐다 보니 드디어 크리스마스트리 전구처럼 반짝거리는 반딧불이의 향연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수컷 반딧불이 한 마리가 바로 눈앞으로 날아가기도 하고, 우리 가족 머리 위에서 춤추다가 멀리 사라져가는 불빛도 보았다. 만화나 영상에서 반딧불이가 일제히 날아다니는 장면을 표현할 때 왜 저렇게 만들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숲 아래쪽에 깜빡깜빡 앉아있다가 한 마리, 두 마리, 그리고 여럿이 나무 위쪽으로 춤을 추며 날아다녔다. 반딧불이는 진짜로 저렇게 날아 빛을 내며 춤을 추는구나. 정말 아름답다 경탄이 쏟아져나왔으나 반딧불이가 놀라 도망갈까 봐 그 감탄 소리도 숨죽여 입을 막고 숲을 거닐었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 하나를 마치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기분이었다.
반딧불이 체험 중에 큰 소리를 내거나 핸드폰 불빛이 새어 나와도 반딧불이를 보기 힘들다고 한다. 강의실에서 핸드폰을 종료하거나 무음으로 바꾸어 가방 속에 넣고 나왔다. 체험은 20여 명이 한 팀이 되어서 진행했는데, 영화관에 가면 한 명은 꼭 중간에 벨이 울리거나 메신저를 하기도 하지 않나. 그런데 반딧불이 축제에서는 단 한 명도 큰 소리를 내지도, 핸드폰을 만지지도 않았다. 반딧불이를 본 사실도 꿈만 같고 신기하지만, 모두가 한마음으로 곤충을 보겠다고 질서정연하게 참여하다니 참 놀라웠다. 아이를 위한 체험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만 해도 어른 셋에 아이 한 명이 참여했고 둘러보니 어른만 온 경우도 많았다. 오히려 어린아이들은 숲이 너무 어두워서 무섭다며 부모님 품에 안겨있다가 잠들기도 했다. 우리 아이도 아빠 품에서 조금 졸지 않았을까 의심해본다. 나처럼 판타지로만 반딧불이를 경험하고 상상했던 이들이 실제로 반딧불이의 춤을 보고 가장 감동했던 체험이었다.
나중에 숙소에 와서 보니 부모님은 많이 지쳐계셨다. 우려했던 대로 식사 후 콜택시조차 잡히지 않아서 한여름 밤 캄캄한 어둠 속을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십여 분 걷다가 편의점을 발견하고 택시 불러줄 수 있는지 물어봤는데 택시회사가 전화를 안 받는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한 시간을 걸어서 숙소가 있는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1km 전에 택시 한 대가 숙소에서 내려오고 있어서 겨우 그 택시를 잡아타고 올라오셨다고 했다. 그렇게 고생하며 올라오는 길에 반딧불이 한 마리가 날아와 보셨다고 한다. 애들이 저걸 보러 갔는데, 우리도 본다고 여기도 있네, 그러셨다고. 일주일의 가족여행 동안 그 날의 일이 가장 기억에 남았고, 일 년이 지나도 가장 많이 회자하고 있다. 역시 여행은 고생을 해야 기억에 남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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